빛으로 생명현상의 신비 들여다보는 다차원 분광학 개척자
빛으로 생명현상의 신비 들여다보는 다차원 분광학 개척자
▲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단장’이라고 써 있는 안내 글씨를 보고 방문을 그냥 밀고 들어갔다. 아뿔싸, 안에서 한 남자가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조민행 고려대 화학과 교수 겸 IBS(기초과학연구원) 분자 분광학 및 동력학 연구단 단장이었다. ‘단장실’에 들어가면 비서 방이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노크를 하지 않았는데, 방 주인의 사적인 모습을 그냥 보고 말았다. 조 교수는 뭐라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했다.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방 안이 깨끗하고 단정하다. 크지 않은 오디오도 있고 가구도 예쁘다. 고려대에서 1996년부터 일하고 있는 조 교수가 IBS연구단 단장이 된 건 2014년이다. 그의 연구단은 IBS 본원이 아닌 고려대에 있고, 이런 경우 외부 연구단이라고 부른다. 그가 이끄는 IBS 분자 분광학 및 동력학 연구단은, 고려대 병원이 지척에 있는 R&D센터 건물 3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1998년 다차원 분광학 첫 논문 발표
조민행 교수는 물리화학자이고, 분광학을 한다. 그는 ‘다차원 분광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몇 명의 연구자 중 한 명이다. “빛을 이용해 물질의 성질을 조사하는 분광학은 오래됐다. 분광학으로 물질의 구조, 전기적 성질, 자기적 성질을 알아왔다. 화학은 분자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화학자는 분자의 구조와 성질을 분광학으로 알고자 한다. 1차원 분광학은 분자에 쪼이는 빛의 색상을 바꿔가며 해당 분자가 어떤 빛을 흡수하는지를 본다. 그런데 분자에 둘 이상의 색깔을 가지는 빛을 넣고 그 빛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보면 그 분자의 특징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이게 다차원 분광학이다.”
그는 다차원 분광학 관련 첫 번째 논문을 1998년에 썼다. 논문 제목은 ‘적외선과 가시광선을 융합한 2차원 분광학’이며 이론 논문이다. 1998년을 전후해 다차원 분광학이 탄생했는데 조 교수가 논문을 발표한 같은 해에 다른 두 사람이 다차원 분광학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로빈 호크스트라서(Robin Hochstrasser·2013년 사망) 교수와 미국 콜로라도대학의 데이비드 조너스(David Jonas) 교수가 각각 논문을 내놓았다. 이들이 내놓은 건 실험 논문이었다. 조 교수가 쓴 건 이론 논문이었는데, 이에 근거한 실험 논문은 1999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존 라이트(John Wright) 교수가 내놓았다.
다차원 분광학 분야는 2002년이 전환점이다. 그해 2월 제1회 다차원 분광학 국제학술회의가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사흘간 열렸다. 그리고 이후 2년마다 다차원 분광학 심포지엄이 아시아와 미국, 유럽 대륙을 돌아가며 개최되고 있다. 제1회 행사는 조민행 교수가 주최했다.<하단 이미지 참고>
“고려대 교수로 일하기 시작한 지 7년쯤 되었을 때다. 아는 외국 학자와 친구, 지도교수 해서 20명을 서울로 초청했다. 한국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돈이 별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비행기표는 각자 사서 왔고, 나는 식비와 만찬 비용 정도만 부담했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했던 위스콘신대학의 라이트 교수가 2년 후에는 ‘내가 위스콘신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겠다’라고 제안했다. 결국 서울 행사를 하면서 향후 학술행사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후 격년으로 행사를 계속해서 열게 되었다.”
지난해 예정했던 행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취소되었고, 다음 행사는 2022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예정되어 있다. 1998년에 ‘다차원 분광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태동했으니, 이제 23년이 지났다. 분야가 얼마나 커졌을까?
세계적으로도 30개 연구그룹만 존재
조민행 교수는 “다차원 분광학은 실험이 어렵다. 기술적으로 어렵다. 이 분야에 뛰어든다 해도 1~2년 안에 성과를 내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다차원 분광학 장비를 만들기는 까다롭고, 분광 장비에 사용되는 레이저는 비싸다. 그래서 다차원 분광학 분야가 나노화학처럼 커지기 쉽지 않다. 한국 내에서 다차원 분광학을 하는 연구자는 김동호 연세대 교수, 주태하 포항공대 교수가 있을 정도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30개 그룹 정도가 있다. 조 교수는 “진입장벽은 높다. 그런데 다차원 분광학 분야 연구가 재밌다”라고 말했다.
그의 다차원 분광학 연구 얘기를 듣기 전에, 그가 어떤 과정을 밟아왔기에 그런 연구의 길로 접어들었는지가 궁금했다. 조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83학번이다. 석사 때는 서울대 대학원 화학과의 서정헌 교수 연구실에서 공부했다. 서 교수는 유기화학자이다. 조민행 학생은 그때 촉매 단백질의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그리고 박사 공부를 하러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갔다. 한 학기가 지나고 그래이엄 플레밍(Graham Flemming) 교수 방으로 들어갔다. 조 교수는 “플레밍 교수님은 지금은 75세쯤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시카고대학에서 버클리(캘리포니아대학)로 옮겼다. 요즘 자주 연락한다. 지난주에 코로나19 백신을 부부가 맞았다고 하신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플레밍 교수에 대한 그의 말이 따뜻하다. 그래서 “지도교수와 인연이 좋았느냐”라고 물었다.
조민행 교수는 “주변에 감사해야 할 분이 많다. 그분께도 감사하다”라면서 말을 이어갔다. “플레밍 교수님의 당시 실험실에는 한국인 학생이 나 하나였다. 내가 숫기가 없고, 말도 안 하고, 그래서 초반에는 적응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4년 만에 졸업했다. 플레밍 교수님이 추천해서, 나는 ‘마크 갤러(Marc Galler) 상’을 받았다. 이 상은 시카고대학의 이과 분야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 작성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미국화학회(ACS)가 주는 그해의 화학 분야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도 교수님이 추천해 주셔서 받았다. 이 상 이름은 ‘노벨상 수상자 서명 상(Nobel Laureate Signature Award for Graduate Education in Chemistry)’이다. 그해까지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서명이 새겨진 동판 패를 준다.”(자료를 찾아보니, 이화여대 화학과의 박소정 교수가 2004년에 미국화학회가 주는 같은 상을 받았다.)
졸업 논문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데 힘입어 조 교수는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플레밍 교수도 좋은 미국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조 교수의 부인은 중문학도였다. 한국을 오가며 논문을 쓰고 있었다. 결국 조 교수는 1998년 초 고려대 교수가 되어 한국으로 왔다. 귀국 전 미국 MIT에서 2년간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했다. 물리화학(이론)자인 로버트 실비(Robert Silbey) 교수 실험실에 있었다.
실비 교수는 엑시톤(exciton)을 연구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반도체, 양자점(Quantum Dot) 물질, 그리고 TV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LED에서 분자가 들뜬 상태가 되면, 그걸 통칭해서 엑시톤이라고 한다. 엑시톤이란 용어의 뒷부분에 있는 ‘on’은 입자를 가리킬 때 쓴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는 ‘엑시톤은 절연체나 반도체 안에서 전자와 양공이 결합하여 만든 준입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조민행 박사후연구원은 실비 교수 방에서 분자의 엑시톤, 즉 분자의 전자 이동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고려대에서 독립적인 연구자로 시작하니, 박사학위와 박사후연구원 때와는 다른 연구를 해야 했다. 시카고대학에서 플레밍 교수와 같이했던 게 ‘시분해 분광학’이었다. 시간에 따라 화학반응에 참여 중인 분자의 분광학적 성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하는 게 시분해 분광학이다. 시분해 분광학 공부를 갖고 그는 다차원 분광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냈다. 조민행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주니어 시절 8편의 시리즈 논문 쏟아내
“A라는 화합물이 B와 C라는 화합물로 바뀐다고 하자. 분자 움직임은 매우 빠르니 그걸 관찰하려면 굉장히 짧은 플래시가 필요하다. 플래시의 빛을 분자에 쪼여서 분자 성질을 조사한다. 아주 짧은 플래시가 터지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하니, 시분해 분광학이 어렵다. 여기서 플래시는 10-15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켜져 있는 펨토초 레이저가 된다. 분자가 먼 거리를 이동하기 전에 펨토초 레이저로 촘촘하고 조밀하게 연속적으로 분자를 관찰하는 거다. 그리고 다차원 분광학은 레이저 펄스를 여러 개 사용한다.”
조 교수는 고려대에 온 해부터 2001년까지 다차원 분광학을 이론적으로 예측하거나 제안하는 논문을 시리즈로 썼다. 조 교수는 “개인적으로 그때가 한 단계 도약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2차원 분광학 관련 시리즈 논문 8편을 화학물리 학술지(Journal of Chemical Physics)에 발표했다. 1998년이면 그는 아직 주니어 연구자다. 그런데 학술지에 시리즈 논문을 썼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조 교수는 “A4 사이즈 10쪽 분량의 논문들이었다. 한 개의 논문으로 끝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변형이 있다. 생각나면 또 쓰고 또 썼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시리즈 논문을 썼기에 학자로서 입지를 일찍 다졌겠다’라고 물었다.
8편의 시리즈 논문에 뭘 쏟아냈을까? 그가 앞서 언급한 ‘적외선과 가시광선을 동시에 사용해서 하는 2차원 분광학’ 관련 논문이 알고 보니, 시리즈 논문의 출발점이었다. 적외선과 가시광선이 아니라, 만약에 적외선만 2개를 갖고 분자에 쪼인다면 관찰할 수 있는 값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연구의 확장이나,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다. 나는 당시에 이론가이니 ‘2차원 분광학이 가능성이 있다. 실험가는 한번 해봐라’라는 식으로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왜 그 시점에서 다차원 분광학이 떴을까? 펨토초 레이저의 등장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나온 것도 배경이 되었다.
조민행 교수는 이론가로 머물지 않고, 실험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했다. 그가 직접 실험을 하지는 않으나 실험 잘하는 연구원을 뽑았다. 실험실을 만들 때 애썼던 사람이 이한주 박사다. 이 박사는 지금은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에서 일한다. 조 교수는 “실험을 해본 것도 아니어서 실험실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이 박사가 아주 잘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카이랄성 측정을 위한 도전
그가 쓴 실험 논문 중 하나가 2009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카이랄 분광학’ 연구다. 카이랄 분광학에 관한 조 교수의 설명을 들어 본다. “자연과학의 큰 질문 두 개가 있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기원이다. 생명 기원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가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게 카이랄성이다. 생명을 이루는 분자는 카이랄 구조를 갖고 있다. 카이랄성은 흔히 사람의 두 손으로 설명한다. 오른손과 왼손과 같이 비슷하나 다른 모양이고 이 같은 특징을 카이랄성이라고 한다. 자연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쪽 형태의 카이랄 분자만 사용한다. 왜 자연은 한쪽 카이랄 분자만 선호하는가 하는 게 미스터리다. 다른 별에 가면 다른 카이랄성을 가진 단백질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할까? 이건 황당한 SF(과학소설)가 아니라 진지한 과학적인 질문이다. 내가 한 실험은 카이랄성을 어떻게 하면 빨리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겠느냐에 대한 도전이었다. 내가 개발한 분광학적 도구가 궁극적으로는 생명현상의 연구에 쓰임새가 있을 거라는 걸 실험으로 증명했다. 그렇기에 이 연구에 많은 사람이 주목했고, 네이처에 실렸다.”
실험 쪽에서 조 교수가 해온 다른 연구가 무엇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2차원 분광학을 이용한 금나노입자의 엑시톤 이완 현상 연구(2016년)와, 2차원 분광학을 이용한 리튬배터리 용매화 현상 규명(2018년 미국화학회지)을 언급했다.
그는 2014년 12월 IBS가 연구단장을 추가로 모집할 때 지원했다. 화학자 커뮤니티의 일부 선배가 조 교수에게 나서야 한다고 ‘압박’을 해왔다고 했다. 조 교수는 “연구단을 발족하면서 다차원 분광학의 연구 범위를 넓혀보자고 생각했다. 분광학 말고 또 다른 주요한 빛을 이용하는 도구가 현미경이다. 내가 하는 분광학과, 다른 연구자가 하는 현미경 연구를 같이하면 구성원들 간의 시너지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현미경 분야 연구자를 많이 뽑았다. 해보니 그쪽도 재밌다. 개인적으로도 이미징 쪽으로 많이 발을 들여놓았다”라고 말했다.
다차원 분광학 분야는 어디까지 연구가 된 걸까? 그는 그간 다차원 분광학 관련 책을 두 권 내놨다. 한 권(‘2차원 분광학’·미국 CRC출판사·2009)은 단독 저서이고, 또 한 권(‘결맞음 다차원 분광학’·스프링거출판사·2019)은 그가 편집자이자 저자로 참여했다. 조 교수는 “다차원 분광학은 어떻게 장비화하느냐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현재는 실험실 수준에서 사용하는 장비만 있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장비를 만들어 사람들이 손쉽게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거기까지 못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는 초기 제품을 내놓는 단계도 아니라고 한다.
NMR이 MRI로 발전했듯 미래의 쓰임새 몰라
조 교수는 NMR(Nuclear Magnetic Resonance·핵자기공명) 분야에 비교해 설명했다. 핵자기공명은 분광학의 한 분야이며, 핵자기공명 현상은 1940년대 후반에 알려졌다. 당시 연구자인 에드워드 퍼셀(미국)과 펠릭스 블로흐(스위스)는 그 공로로 195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조 교수는 “그들은 NMR이 나중에 MRI(자기공명영상)라는 의학장비로 사용될지는 몰랐을 거다. 다차원 분광학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NMR의 경우 1970~1980년대에 ‘다차원 NMR’로 분야가 확장됐다. 다차원 NMR 연구로 리처드 에른스트(스위스)가 1991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2차원 NMR을 갖고 스위스 화학자 쿠르트 뷔트리히가 단백질 구조를 알아냈으며, 그 연구로 2002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조민행 교수는 “NMR이 자석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적외선, 가시광선, X선과 같은 빛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두 분야가 다차원으로 확장되었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두 분야가 흐름이 비슷하나 다차원 분광학은 전혀 다른 기술 발전이 필요했기에 시간적으로 NMR 분야에 비해 늦어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IBS 연구단이란 큰 조직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단독 논문을 수년 만에 한 번씩 내고 있다. 요즘 과학계 추세는 논문 하나에 이름이 많이 들어간다는 거다. 수백 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조민행 교수는 공동저자 없이 자기 이름만 들어가는 논문을 쓴다. 그는 “이론 논문이다. 그런 논문에 애착이 많이 간다”라고 말했다. ‘진동분광학’ 연구가 그중의 하나라고 했다. 그에게 들은 ‘진동분광학’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이 글의 분량이 길어졌으므로 여기에 소개하지는 못한다. 그에게 화학을 왜 공부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형은 생물학(연세대 조면행 교수)을 하고 동생은 물리학(연세대 조수행 교수)을 한다”라며 답을 대신했다.